의학과 한의학의 타임패러독스타임패러독스(time paradox)는 시간여행을 가정할 때 벌어지는 여러 가지 모순을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상으로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의 만남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사람은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서로 같지만 다른 두 사람의 나는 아무런 모순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2016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논란은 일종의 타임패러독스다. 시간적인 선후(先後)가 명백한, 논리적으로는 동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의학과 한의학이 공존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인위적인 접점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하여 혼란을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자연을 탐구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으므로 만물을 사변적(思辨的)으로, 즉 ‘실제 경험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천동설이다. 이는 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시인들은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 것을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에게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여겨 병이 들면 제사를 지냈고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몸이 네 개의 체액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 질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17세기, 유럽에서는 갈릴레이, 뉴턴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기존의 사유적, 관념적인 과학이 아닌, 실험과 증거를 중시하는 새로운 조류의 과학이 출현했다. 이것이 이른바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 분야는 여전히 고대 의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체액간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하여 피를 뽑는 사혈(bloodletting) 치료가 근대의 유럽에서도 여전히 널리 이용되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179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워싱턴이 감염증으로 쓰러졌을 때 당대 미국의 최고 의사들이 사용한 치료법 역시 사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전통적으로 내려온 의학의 치료방법이 정말 치료효과가 있는지를 의심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사혈을 비롯한 사변적인 의학이론에 기초한 치료방법들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은 환자와 받지 않은 환자를 나누어 생존율을 비교함으로써 비로소 전통 의학의 치료법들이 대개는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유해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근거가 없는 치료들은 하나, 둘씩 퇴출되었다. 실험군과 대조군의 개념이 의학에 도입되었고 수학과 통계를 이용한 치료방법의 검증이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자리함으로써 비로소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 확립되었다.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S. Kuhn)은 과학의 발전은 지식의 축적이 아닌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했다. 천동설로 대표되던 근대 이전의 사변적이고 종교적인 과학이 실험과 실증이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전혀 새로운 근대과학으로 거듭남으로써 오늘날 생명체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우주를 여행하는 첨단과학시대에 이르게 된 것처럼 의학 역시, 사람의 몸과 질병에 대한 상상과 사유에서 벗어나 기존의 의학을 부정하고 의심하고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검증함으로써 오늘날의 의학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기존의 의학 지식에 대한 의심과 검증이 의학의 현대화이며 현대의학의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보편적인 발달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한의학은 아직까지 근대 이전의 의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과학적으로 실체가 입증되지 않은 기혈(氣穴)과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의 사변적인 철학으로 인체와 병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한 치료법들 역시 현대적인 과학의 방법론을 통하여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받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아직 과학혁명 이전의 의학의 틀을 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와 한의사가 동등한 자격의 의료인으로 인정받음으로서 온갖 혼란을 자아내는 대한민국 의료계의 현실은 그야말로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와 만나 벌어지는 타임패러독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의학과 한의학은 양식과 한식처럼 기호에 따라 골라 사용할 수 있는 대등한 선택항이 아니며 영어나 한자처럼 지리적으로 구별되는 문화양식도 아니다. 굳이 관계를 따진다면 한의학은 서양이나 인도, 아프리카와 같은 세계 각지에 존재했었던 전통의학 중 하나이며 현대의학의 조상 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한의학계는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를 위하여 현대의료기기의 사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불행히도 한의학과 같은 이전의 의학이론들이 과학화를 거친 결과가 오늘날의 현대의학이다. 따라서 한의학의 과학화는 사실상 자기부정이며 ‘천동설의 과학화’, ‘4체액설의 과학화’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현대의료기기를 통해 한의학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그랬듯 기존의 한의학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황제내경(皇帝內徑)이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한구절, 한구절을 의심하고 검증함으로써 버릴 것은 버리고 유효성과 안정성이 입증된 것들은 의학의 한 범주로서 편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한의학의 과학화이며 현대화다. 그런데도 도처에 기가 허하니 보해야 한다며 한약을 권하는 한의사는 많지만 누구 하나, 기존의 한의학을 비판하고 의심하는 한의사는 보기가 어려우니 안타까운 일이다.대한전공의협의회 기획이사 고려대학교안산병원 내과 김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