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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사, 감당하기 힘든 존재의 무거움 (제22기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용욱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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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호자분, 아드님이시라고 했죠? 잠시만 이쪽으로…"
"네…"

'난로 불이 옮겨 붙어 발생한 심재성 2도 화상으로 인한 합병증 우려로 귀원으로 전원 - 심근경색 고혈압 당뇨병 알코올성 간질환 및 치매 병력'이 적힌 전원의뢰서만으로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 의사M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호자와 나란히 벽에 기댔다.

아무리 치매라한들 아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한 환자와 그런 환자에게 대신 물어봐주거나 그렇다고 환자에 대해 제대로 답해주지도 않으려는 슬프기보다는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상황을 회피하려는 듯한 보호자. 억지로 어두운 세월을 밝게 물들여보려 애써본 듯한 아들의 노란머리는 관리한 지 몇 달은 된 듯한 파마처럼 흐릿했다. 눈가의 주름까지 검게 그을린 얼굴과 험한 세월이 짐작되는 투박한 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애써 차려입은 재킷은 이런 모든 어색함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어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2. 설 연휴에 봐야 할 환자는 잔뜩 밀려있지만, 지금 눈 앞에 흩뿌려져있는 파편들을 맞춰가야만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다. 왜 이렇게 다친 사람이, 다른 병원을 거쳐 굳이 이 응급실까지 오게 된 걸까. 사람과 병을 다루는 과학자, 의사들은 이럴 때 하릴없이 을이 되고 만다. 온통 뒤죽박죽인 상황에 짜증을 숨기지 못한 채 조금은 다그치는 듯한 말투로 병력을 묻던 의사M은 그래도 다행히 무모하게 파편을 즈려밟고 나아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톺아보기를 택한 듯 숨을 고르고 나란히 벽에 기대 선 채 보호자의 손을 마주잡고 오른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말을 건넸다.

"솔직히 뭔가 상황이 좀 이상해서 여쭤보는 거긴 해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런데, 제가 제대로 알아야 잘 도와드릴 수 있거든요. 다 괜찮으니까, 저에게 편하게 천천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3. 따스한 보금자리는커녕 인생의 그늘이었을 뿐이었던 집을 박차고 나온 지 20여 년. 그 세월을 오롯이 혼자 아등바등 이겨내고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 가족과 따스한 보금자리를 일궈내어 이제는 이전의 명절보다 조금은 덜 외롭게 지내고 있던 어느 설날 갑자기 처절히 망가져 그의 인생에 나타난 잊고 지낸 아버지라는 '저 사람'. 아마 그를 집 밖으로 내몰아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 놈의 술은 등진 세월동안 이미 '저 사람'을 처절히 망가뜨려 정작 지금은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수 개월 전 어지럽다고 해 데려간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 진단에 이은 심혈관스텐트 시술에 알코올성 치매라는 이름의 위축된 대뇌와 정상일리 없는 간기능, 거기에 수 년간 방치되었을 당뇨병과 그 외의 합병증까지 확인한 오랜 중환자실 치료 끝에 일단 살려는 놓은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한 친척 아무개는 이후 몇개월간 시 외곽 비닐하우스에서 아마도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등유난로를 잘못 다뤄 발생한 화재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은 '저 사람'을 이제는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는지, 며칠만에 기어코 그를 찾아내, 아들이라는 책임을 지우는 잔인한 인수인계를 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화재현장에서 멀지 않은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온갖 병에 성치 않은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니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소견서를 들고, 보호자가 된 지 고작 24시간도 채 되지 못해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당도하게 된 그는, 한참을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던 의사M의 침묵을 깨려는 듯 이윽고 되물었다.

"저, 선생님. 저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죠?"

4. 처치가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의 거주지와 동선을 고려하고, 연휴기간임에도 지속적으로 외래로 방문할 수 있어 비용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 할 수 있는 곳을 운 좋게 수소문한 의사 M.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했을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번에도 기어코 선을 넘고 말았다.

"저기, 보호자분"
"네"
"제가 뭐라고 함부로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죠. 그래도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기에 저는 지금 아드님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네"
"주제넘을 수 있는데,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어요. 본인은 잘못 없어요."
"…"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뿐이에요.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저라도 잘 모를 거 같아요. 그 누구도 몰라요. 어쨌든 아드님은, 아무런 잘못 없어요."

어깨를 토닥이는 의사의 팔에 매달리듯 두 다리를 겨우 버텨낸 채, 20여년의 원망과 회한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그의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5.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어요", "아이 키우다 보면 이런 일 있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서 확인되는 경우도 있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가구에 부딪쳐 부러져버린 아이의 발가락도, 보글보글 궁금한 커피포트를 엎어 크게 데인 물집도, 울면서 데굴데굴 구르게 하는 요로결석도, 그리고 이미 늦어져버리게 퍼져버린 악성종양까지도, 차라리 나의 아픔이었으면 하는 애달픈 사랑에 가슴을 부여잡고 울음을 참고 있는 가족.

그들이 가장 위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해 보호자에게 종종 느닷없이 불쑥 용서와 위로를 감히 건네곤 했던 의사M은, 이후로 더 신중해졌다고 한다. 진심을 담은 위로란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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