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진 칼럼

‘의료현실’의 단단한 알껍질을 깨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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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현실’의 단단한 알껍질을 깨뜨리자

11월 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실시되었다. 출간 18개월 이상의 ‘구간’도 할인율을 제한하게 되면서 서점가에서는 때 아닌 책 사재기의 열풍이 불었다. 더불어 고전이나 철학서 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이 대부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동네서점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며 나온 아이디어가 도서정가제다. 하지만, 실제로 도서정가제가 동네서점의 부흥과 장기적인 시장 가격 안정화를 가져올지, 단순히 할인 폭을 제한하여 ‘제2의 단통법’의 불명예를 안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어떤 정책을 실현함에 있어 충분한 사회적 공론화와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으로만 진행되었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겪어야 할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손실은 막대하고 어떤 경우 훗날 돌이키기조차 어렵다. 이는 전 정부의 4대강 사업이나 최근의 단통법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현 정부가 진행 중인 자유무역협정 등 경제 정책들에서도 그러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원격의료와 보건의료 투자활성화 정책들이 바로 그러한 정책들일 것이다.




원격의료는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의료정책의 뜨거운 감자였다. 원격의료 추진에 대한 정부의 집착이 의료계와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히며 시범사업에 대한 많은 논쟁이 오고갔지만 이는 사실 매우 소모적인 갈등이었다. 원격의료 시범사업은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기획재정부에 의해 '스마트케어 시범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된 적이 있었다. 당시 355억 원을 들여 추진했던 원격의료 시범사업은 명백한 실패로 결론지어졌다. 시범사업 결과 원격 진료가 기존의 대면 진료에 비해 안전성, 효과성, 경제성이 있다는 걸 입증하지 못한 것이다. 시범사업에서 꽝이 나오며 무덤 속으로 들어갔던 원격의료가 현 정부 들어 또 다시 관뚜껑을 열고 살아 돌아온 샘이다.

원격의료가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들이는 비용에 비해 효과성이 없다는 것을 정부가 이미 직접 증명했던 샘이니 그것을 다시 추진하는 것을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원격의료란 새로운 장비의 도입 정도의 차원이 아닌 국민들의 의료이용 행태와 의료계의 판도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커다란 문제인 만큼 국민건강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정부라면 의료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실패한 시범사업을 강행하며 전문가들의 의견은 묵살하고 있다. 정부는 시범사업에 대한 의료계의 참여 거부와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당초 계획보다 시범사업의 규모와 기간을 대폭 축소시키고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국민들과 그들을 돌보려는 전문가 사이에 장벽을 없애주고 적절히 매개해주는 것이 국민들의 복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해야 할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원격의료와 영리 자회사 허용 등의 정책들은 ‘선진화’, ‘투자활성화’라는 경제 성장 논리의 하나로만 의료를 바라보고 있고 이러한 방향으로 치달을 경우 의료는 거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에 의해 잠식될 개연성이 높다.


‘의료 영리화’라는 표현이 그저 추상적인 외침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 될 경우 우리는 한 사람의 의사이기 전에 경영 효율화와 이익 극대화의 틀에 종속될 수 밖에 없고, 의료인으로 가지는 독립적인 지위 하에서의 본연의 진료가 아니라 투자자의 수익을 극대화시켜 주기 위한 진료, 자본 논리에 좌지우지 되는 반쪽짜리도 되지 못하는 의료 행위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사회가 바라보는 의사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우리 전공의들마저 그런 과거를 답습해 갈 필요는 없다. 사회의 인식은 쉽게 바뀌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고착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고, 의료 본연의 가치를 놓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는 바뀔 수 있다. 원격의료나 의료영리화와 같은 문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도, 오랜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으며, 구체적인 장기 계획까지도 마련되어 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

도서정가제에 앞서 책 사재기에 동참한 필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부라고 생각하는 단단한 알을 깨뜨려야 한다. 보다 큰 세계로 태어나기 위해.


제18기 대한전공의협의회 대외협력이사 김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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