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외국어 학원의 프리토킹 수업을 듣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듣게 된다. 한 달 전쯤엔 70 년대부터 현대그룹 관련 회사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연세가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때엔 회사에서 퇴근을 못해서 감기 몸살이 나면 회사 안에 있던
병원에 누워 있다가 바로 출근을 해야 했어요, 회사 눈치를 보느라. 그러다가
아예 이걸 대학병원을 세우자.. 그래서 아산 병원을 세우기로 했던 거죠.”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 아산 병원의 창립 배경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냥 사석에서나 나올 수 있는 비약된 이야기일 것이다. 기업이 원하면 마음대로 의과대학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그 설립에 있어 가장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토리 텔링을 가진 의과대학이라고 하면 세브란스일 것이다. 루이스 세브란스 씨는 록펠러 씨의 동업자이자, 지금은 엑슨 모빌의
이름으로 남은 스탠다드 오일 회사의 대주주였다. 멀리 이름도 몰랐던 타국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액을 기부했고 이로 인해 설립된 것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다. 세브란스
병원의 역사는 단지 세브란스 병원만의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의 의학을 지켜낸 보루로서 큰 의미가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 의학의 영향을 받아 의학용어의 상당 부분을 독일어를 주로 쓰고 있는 일본과 달리 오늘 날 우리나라의
의학용어 상당 부분을 영어를 쓰고 있는 것은 세브란스 병원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그 역사의 길이와 설립 배경이 전혀 다른 두 학교가 최근 언론에 이름을 같이 오르내리면 서로 경쟁을 하는
분야가 생겼다. 그것은 전공의 시급 문제다. 간단하게 말해
병원측이 전공의 추가근로 수당이나 기타 지급액을 줄이기 위해 본봉을 깎겠다는 얘기이고 그러다 보니 두 병원의 전공의 시급은 대한민국의 최저 임금액에
가까울 정도로 낮게 책정을 했다는 얘기이다.
비싼 의과대학 등록금과 재학기간을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아르바이트 시급과 별 차이가 없는 전공의 시급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전공의를 마치고 나와도 예전과는 다르게 의사들에게 별다른
좋은 보수의 직장이 그리 많지 않다. 예전 시대처럼 힘든 전공의 시절만 참고 마치고 나오면 모든 것이
보상되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세브란스와 아산 병원의 전공의 시급은 전공의들에게 일방적으로
손해를 강요하는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이 아산 병원보다는 역사가 더 깊지만 그 역사라고 해도 불과
100 년 남짓이고, 한국의 의료 분야는 한국의 경제 성장처럼 짧은 시간 동안 ‘빅뱅’을 했다. 정부는
짧은 시간에 불어난 부피를 통제하기 위해 단 하나의 보험 체계를 전국의 모든 병의원에 강제했고, 낮은
수가를 강제해 박리다매 식의 행위량 증가를 유도해, 전국의 병의원들은 많은 의료행위를 할수록 수입을
늘릴 수 있는 구조에 익숙해져 왔다. 대한민국이 지극히 가난하던 시절에 고안된 이런 방식의 부피 성장은
그 급속 성장기 때엔 일견 성공적인 요소가 많은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비저상적인 초저수가는 상식적인 수준을 이미 한참 전에 벗어났고, 그럼에도 이미 수십 년 전에 개혁의 칼을 들이댔어야 하는 초저수가 강제지정제는 자신들에게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공무원들 손에 쥐어진 채 계속 감감 무소식이다. 이 대한민국의 보건의료계 공무원들의 심각한 문제점은
웬만한 쓸만한 자신들의 퇴직 후 이직처까지 철저하게 돌려 막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키워낸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혹은 언론을 길들여 철밥통을 유지하는 수완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관피아’들이다.
메르스 사태를 봐도, 이 전공의들의 시급 문제를 봐도 이미 대한민국의
낡은 의료체계는 붕괴를 지속하고 있으며, 이를 의료전달체계를 일부 개선하는 시늉을 하거나 포괄간호 서비스
확대와 같은 어설픈 수단 등으로 돌려막기를 했다가는 대재앙이 본격적으로 폭발을 거듭할 것이 명백하다. 하지만
이미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관변학자들만 생존시키고 자신들에게 거스르는 말을 하는 웬만한 학자들을 생태계에서 싹 씨를 말려버린 보건복지부와 정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집단 자체가 별로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고, 대재앙은 이미 시작되지만, 오로지 진료실과 응급실에서 오늘 하루도 가혹한 현실과 씨름을 하면서 화가 나게 된 일부 의료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가끔 인터넷에 올려 푸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아산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세브란스의
경우는 그 설립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루이스 세브란스 씨의 숭고한 기부의 정신과 취지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루이스 세브란스 씨의 세브란스 설립 취지는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루이스 세브란스 씨가 매일 잠을 못자며 환자를 돌보면서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 전공의들의
시급을 깎아가면서 병원을 유지할 생각으로 그 거액을 태평양 건너의 타국으로 기부하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설립 취지가 심각하게 훼손된 이유는 현재의 세브란스 재단의 잘못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부피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의료제도의 근본적인 한계를 수정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그대로 뭉개고 있는 보건의료 ‘관피아’들과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키워 낸 의학도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전제로 유지될 수 있는 병원이 되었다면 이제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 의미는 다시 재고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더불어 세브란스 재단 뿐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의료계의 기성 구성원 개개인에게 널리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은 대한민국 의료계의 스승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루하루 환자를 보면서 아침을 시작해, 환자를 보다가 저녁을 마치고 마는 당신의 일상만이 스승의 길이 맞는가?’전국의사총연합 사무총장 정성일- 위 사진은 정성일 사무총장님 페이스북 프로필 입니다.